꿈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을까요
네.
저는 꿈이 없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살면서 여러 번 무언가를 꿈이라고 정해보기는 했습니다. 다만 제가 그것을 정말로 믿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대부분은 주변에서 좋다고 말하거나 그저 멋있어 보여서 잠깐 붙잡아 본 말들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게 제게는 크게 와닿지 않는 단어라는 걸 알게 되곤 했습니다. 그렇게 꿈을 정했다가 흘려보내는 일이 몇 번 반복되고 나면, 결국 같은 생각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이게 다 조금 부질없는 일이 아닐까. 오랫동안 이 생각이 저를 불안하게 했습니다. 선명하게 믿을 수 있는 꿈이 없다는 건 방향이 없다는 것처럼 느껴졌고, 방향이 없다는 건 결국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할 거라는 뜻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각자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저는 조금씩 제가 잘못된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돌이켜 보면 어린 시절의 저는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아예 꿈을 정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저 수학과 과학을 공부하는 일이 좋았고,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문제를 풀고 이해되지 않던 개념이 어느 순간 서로 연결되는 그 감각이 그냥 좋았던 것입니다. 무엇이 되고 싶은지 정해두지 않아도 저는 이미 충분히 즐거웠고, 그저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저의 삶은 제가 느끼는 재미보다, 그 재미가 데려다줄 수 있는 자리로 설명되기 시작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저의 성적을 보고 어떤 길을 원했습니다. 그 정도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꼭 제가 원하는 길은 아니었지만, 오래 듣다 보니 저도 어느새 그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충분히 높은 곳에 도달하면 지금 느끼는 막연한 불안들은 자연스럽게 사라질 거라고, 성취가 곧 답이 되어줄 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입시 학년이 되었을 때는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즐겁게 공부하던 시간은 어느새 스트레스를 버티며 공부하는 시간으로 바뀌어 있었지만, 그래도 계속 버텨서 결국엔 원하던 결과를 얻어냈습니다.
결과를 확인하던 순간이 아직 기억납니다. 기쁘지 않았고, 그렇다고 허탈하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그렇게 간절히 원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그저 오래 버틴 일이 끝나서 후련했다, 딱 그 정도의 감정이었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전공을 정하지 않고, 그냥 자유전공을 선택했습니다. 조금 더 열려 있는 곳에서 시간을 가지면 방향이 보일 거라고 기대했지만, 오히려 더 모르겠더라고요.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자유로워지기는커녕, 무엇을 골라야 할지 더 막막해졌습니다. 주변 친구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학점을 올리고, 대외활동을 하고, 스펙을 쌓고, 진로를 준비했습니다. 친구들이 인턴 공고를 공유하거나 다음 학기 수업 전략을 이야기할 때, 저는 그 옆에서 조용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이해는 했고 궁금하기도 했지만, 선뜻 따라 움직여지지는 않았습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도 전에, 그 끝의 공허함을 먼저 상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과를 확인한 그날에 느꼈던 조용함을 또 한 번 맞이하게 될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방황했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히 다녔지만, 속으로는 계속 같은 질문 위에서 맴돌고 있었습니다. 저도 친구들처럼 살고 싶은 건지, 아니면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느끼는 건지, 저 자신도 잘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방황이 언제 끝났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어떤 큰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고, 그저 어느 날부터인가 저 자신에게 조용히 이런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삶에는 처음부터 정해진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고. 처음에는 그저 가설 같은 생각이었는데, 이상하게 이 말이 자꾸 맴돌았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어딘가에 정답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꿈, 진로, 성공, 성취. 그중 하나를 제대로 붙잡으면 삶의 불안과 공허함이 사라질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 답을 찾지 못하는 동안에는 아무것도 제대로 시작할 수 없었고, 저는 계속 그 자리에 멈춰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런 정답이 애초에 없다면, 삶이 완성된 의미를 미리 쥐여주지 않는 것이라면, 의미를 먼저 찾아낸 뒤 움직이겠다고 버티는 것은 그 자체로 멈춤일 뿐인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즈음 어떤 책을 읽다가 한 문장 앞에 오래 멈춰 있었습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였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온 정신의학자가 수용소에서 겪은 시간과 그 안에서 길어 올린 생각들을 적어 둔 책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삶을 향해 “내가 무엇을 바라는가” 를 묻지 말고, 반대로 “지금 삶이 내게 무엇을 묻고 있는가” 를 들어야 한다고. 의미는 미리 준비된 답이 아니었습니다. 매 순간 삶이 던지는 질문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에서 천천히 만들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극한 속에서도 끝내 무너지지 않은 사람들은 늘 “붙잡고 있는 무언가” 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꼭 거창한 꿈이어야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마저 완성하고 싶은 한 편의 글, 다시 만나고 싶은 한 사람, 그 정도면 충분했다고 그는 적었습니다.
이 문장들이 왜인지 한참 머릿속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오랫동안 붙잡고 있던 질문의 방향이 처음부터 어긋나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삶을 향해 계속 “내가 무엇을 원하는가” 만 묻고 있었는데, 그 질문 자체가 답을 낳지 못하는 형태일 수도 있었습니다. 의미는 먼저 손에 쥐어진 뒤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뭐든 시작해 본 뒤에 그 위에서 조금씩 자라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천천히 자리 잡았습니다.
생각의 방향이 조금 바뀐 뒤에도 허무해지는 순간은 여전히 찾아옵니다. 다만 허무하다고 해서 오늘의 일까지 멈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지금도 가끔, 무언가를 열심히 하다가 문득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지?”라는 생각을 합니다. 예전에는 그 생각이 저를 멈추게 했지만, 지금은 그러려니 합니다. 그런 기분은 찾아왔다가 지나가고, 그러는 동안에도 오늘의 일은 계속 남아 있으니까요.
저는 이제 큰 질문을 미리 답하려 하지 않습니다. 꿈이 무엇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끝내 다 설명할 자신이 없습니다. 대신 지금 당장 제가 풀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를 보고, 흥미를 느끼는 일에 몰입하며, 한 번 선택한 일에는 가능한 한 깊이 들어갑니다. 그 일이 영원한 의미를 보장하지 않더라도, 저에게 진실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한 일이 끝나면 또 다음 일을 찾아 나섭니다. 어떻게 보면 끝나지 않는 반복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의 저는 무언가를 붙들고 있는 사람이고, 그래서 예전처럼 그 반복이 두렵지는 않습니다.
그 ‘무언가’는 자주 바뀝니다. 어떤 때는 코드의 작은 문제 하나를 해결하는 일이고, 어떤 때는 낯선 책 한 권을 끝까지 읽어 보는 일이기도 하며, 어떤 때는 그저 하루를 성실히 보내는 일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건 그것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제가 그 일에 정직하게 임하고 있느냐 하는 것 같습니다. 이상하게도 한 가지에 충실히 들어가 있을 때에는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지?”라는 질문이 잘 찾아오지 않고, 그 질문은 주로 제가 어디에도 발을 딛지 못하고 붕 떠 있을 때 찾아옵니다. 그래서 요즘은 가능한 한 어딘가에 발을 두고 있으려 합니다. 꼭 대단한 자리일 필요는 없고,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을 오늘 하루치만큼 정직하게 해 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바라는 삶은 점점 그 정도로 단순해져 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몇 가지 기준을 갖고 살려고 합니다. 거창한 원칙이라기보다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혼자 세워 둔 약속 같은 것입니다. 멀리 있는 답을 미리 만들어 놓지 않으려 하고, 그 대신 눈앞의 일에 정직하려 합니다. 제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혼동하지 않으려 하고, 통제할 수 없는 것에는 불필요하게 애쓰지 않으려 합니다. 쓸모 있어 보이는 일만 고집하지 않고, 흥미가 옮겨 가면 옮겨 가는 대로 따라가 봅니다. 그리고 한 가지 일에 들어갔을 때는 가능한 한 끝까지 가 보고, 끝이 나면 담담히 다음을 찾아 나섭니다.
그냥 이런 기준으로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물론 이 기준들이 평생 저를 안내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고, 살다가 어느 하나가 틀렸다고 느껴지면 그때 바꾸면 될 일입니다. 다만 이런 기준들을 품고 있으면 큰 답이 없어도 하루를 살아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저는 꿈을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고, 앞으로도 그럴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 그 사실이 저를 멈추게 하지는 않습니다. 꿈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을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쩌면 꿈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답을 미리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의 선택에 더 진지해질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완전한 답을 찾았기 때문이 아니라, 완전한 답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예전보다 조금은 덜 불안합니다.
물론 종종 누군가가 꿈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저는 여전히 조금 머뭇거리는데, 멋지게 정리된 한 문장이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그 머뭇거림 자체가 부끄러웠지만, 지금은 그냥 솔직하게 “아직 잘 모르겠다”고 답합니다. 그 대답이 누군가에게는 무책임하게 들릴 수 있다는 것도 알지만, 꾸며낸 대답을 내놓는 것보다는 모른다고 말하는 쪽이 지금의 저에게는 더 정직합니다.
꿈이 없다는 것은 방향이 없다는 뜻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요즘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방향은 미리 쥐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작은 선택들이 쌓이면서 뒤늦게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완성된 의미는 여전히 제게 없고, 아마 앞으로도 찾아지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그래도 그걸 알면서 오늘 하루를 살아낼 수 있다면, 저한테는 그 정도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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